술 마시고 싶은 시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 4편
<비 오는 날, 도두항의 포구와 바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성산포에선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선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싫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 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시 전체에 와랑와랑 고독함이 풍랑처럼 넘실대는 듯한,
' 제주' 하면 그냥 떠오르는 이생진 시인의 그 유명한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상하게도 이 시를 읽으면서 전혀 무관한 박인환 시인의 시에 나오는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가 오버랩된다
*'와랑와랑'은 제주말로 '이글이글, (햇빛이)쨍쨍 이란 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