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막일기,8 -이사벨라
이곳 강원도는 9월쯤 부터 다음해 5월 까지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한다. 해가 지면 주위 온도가 급격하게 떨
어져 불을 피우지 않고 오래 누워 있으면 곧 동태가 되어 버린다. 구들방이니 땔감은 필수다.

여기 저기 죽은 나무나 꺽여 쓰러진 나무들이 지천으로 있어 주워다가 땐다. 굳이 나무를 사지 않아도 아직까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를 사면 자르고 쌓고 옮기고 하는 일이 더 문제가 될 것 같다. 허름한 시골집, 장작을 패서 집의 담벼락 한 면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벽을 보면 건축의 미학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무를 쌓는 가장의 가족에 대한 뜨끈뜨끈한 마음과, 켜켜이 줄 맞춰 쌓아 준 장작으로 군불을 때 주고 그 따뜻한 방에 누워 평화롭게 잠들 수 있는, 지금 내게 없는 소박한 행복의 온도가. 도시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았던 거칠고 못이 박힌 손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손인지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이리저리 쓰러진 나무들을 서투르게 주워다 어설프게 불을 부친다. 오래 비워 둔 아궁이가 마르고 구들장이 달궈 지려면 몇 시간을 때야 된다. 그러나 한 번 달궈지면 쉽게 식지 않는 방. 세상의 모든 일이 처음엔 다 쉽지 않듯, 그러나 일단 이루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수월해 지는 것 것처럼. 집에서 모아 온 신문이 요긴하게 쓰인다. 이 곳에 오면 도시에서 버려 지는 모든 것이 다 용도가 있다. 거리를 걷다 쓸모있음직한 것들을 보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워다 차에 실어 놓는 버릇이 생겼다.
긴 시간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땐다. 나비만큼이나 큰 나방이 한마리가 아궁이 앞을 떠나질 않는다. 활활 타는 불꽃을 향하여 돌진한다. 거의 날개가 불길에 탈뻔 하다 간신히 피해 나오길 반복한다. 잡아서 쫒아 내려는 내 손길 앞에서, 불 앞에서, 위태로운 날갯짓을 하며 오로지 불꽃만을 향한다. 노란색의 날개에 검은 점무늬가 있는, 이사벨라 불나방 이다.' 이사벨라'?
성녀 이사벨라, 홍콩영화 제목 이사벨라, 영국출신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이렇게 예쁜 나방이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 불나방은 암컷임이 분명하다.
어쩌자고 목숨을 거는 것일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지키려 하는 것을.
목숨을 걸만큼의 절박한 갈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 살면서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에게 지금이라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저 이사벨라와 같은 맹목성이 남아 있을까?
확신에 차 단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사벨라만도 못한 삶을 살아온 건 아닌가 몰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2번 D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