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에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중 윌리엄 워즈워드에 관한,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1770년에 레이크디스트릭트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코커머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런던과 케임브리지에 가 있던 기간과 유럽여행을 하던 기간을 빼면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 평생을 보냈다.
도시에 대한 워즈워드의 불만에는 매연, 혼잡 가난, 추한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우리의 건강보다는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도시의 영향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 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드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귀를 곤두 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 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고립된 농가에 사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도시가 습관적으로 길러내는 그 저열한 감정들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 자연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내가 세상과 뒤섞이면서도
내가 가진 소박한 즐거움에 만족하며,
하찮은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멀리하며 살아 왔다면
그것은 그대 덕분이다......
그대 바람과 요란한 폭포......그대 덕이다.
그대 산이여, 그대의 덕이다. 오 자연이여!'
워즈워드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워즈워드의 주장을 받아 들이려면 그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때로는 사물-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감수성이 예민해 지는 반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폭포나 산 떡갈나무나 애기똥풀, 즉 의식적인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특정한 행동을 조장하거나 억제할 수도
없을 것으로 보이는 사물과 함께 있을 때 사람의 정체성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워즈워드의 주장에 따르면 생명이 없는 물체도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연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암시하는 힘이 있으며 -떡갈나무는 위엄, 소나무는 결단, 호수는 침착- 따라서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미덕에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워즈워드는 어떤 젊은 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이 체현하고 있는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위대한 시인은 .......
어느 정도는 인간의 감정을 교정해야 합니다......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건전하고 순수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연과 좀 더 일치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워즈워드는 자연의 모든 풍경에서 그런 건전 순수 영속의 예들을 보았다. 예를 들어 꽃은 겸손과 온유의 모범이었다.
'이 햇살과 공기를 나와 함께 마시는
착하고 고요한 생물체여!
그대는 전에도 그랬듯이 나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그대의 온유한 성품까지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것인가! <데이지에게>
또 동물들은 금욕주의의 전형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도브코티지 위의 과수원에서 빠짐없이 노래하는 푸른박새에게
큰 애착을 가진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