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빗줄기 끝에 나온 흰 구름이 왜 이리 예쁜지, 방안에서 바라 보이는 이 풍경들을 볼 때마다 행복함을 느낀다. 행복은 또한 얼마나 주관적인지...>
색다른 시도를 목격하는 일은 천편일률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즐거움을 준다. 오규원 시인의 사후에 발표된 이 시들이 그렇다.
사물의 있음, 또는 움직임같은 것들에 통념적으로 부여하는 이념의 개입없이, 치장이나 언어적 수사를 배제한 최소의 언어로 투명
하고도 정밀(靜謐)한 표현의 시들을 읽으면.
그의 유고 시집 '두두'에서 몇 편 발췌해 본다
<4월과 아침> < 나무와 허공> < 새와 날개>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잎이 가지를 떠난다 가지에 걸려있는 자기 그림자
와르르 태어나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새 한마리 날아가네
4월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날개없는 그림자 땅에 걸리네
<빗방울> < 가을이 왔다>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대문을 열고 들어 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롭-롭-롭-롭 떨어진다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나무와 햇볕>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산뽕나무 위에 알몸의 햇볕이 우리집 강아지 오른쪽 귀와
가득하게 눕네 왼쪽 귀 사이로 왔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창 앞까지 왔다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 까지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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