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87

우리 동네 종 치는 두부장수님

오후 3시 28분. 두부 장수님 종소리에 불현듯 시간을 본다 오늘도 변함없이 30년이 넘도록 늘 3시 25분에서 3시 40분 동안 고요한 북한산 밑 동네에 울려 퍼지는 청아한 손종소리 종소리가 들리면 일상을 때리는 경각심이 그의 안녕함에 대한 안도와 함께 온다 그의 작은 용달에 실린 물건들을 다 사주고 싶다. 긴 세월 한결같은 그의 종소리 한 번쯤은 와락, 손종 치는 손을 잡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싶다.

나의 시 2024.04.25

<분꽃을 위한 패러디>

ㅡ 이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꽃이여, 별스런 시선도 없지만 화려한 다홍색 꽃무리 무더기로 피어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데 뜨락에 무리 지어 날아와 꽃 속에 코를 박고 있는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심지어 나방이와 파리도 가까이 오지 않는구나 늦은 오후에 피어 밤새 향기를 날리다 아침이면 긴 잠에 빠져 드는 꽃이여, 청담동 건물 지하로 저녁 출근하는 *내 누이 같은 꽃이여 *그 색과 향기가 너무 고와서 서러워라 송이송이마다 씨를 남기고 비장하게 떨어지는 꽃이여, 울지마라 꽃이여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노천명의 '사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조지훈의 '승무' 정호승 '수선화에게' 중에서

나의 시 2020.09.14

<밤바다>

ㅡ이선 한여름 내내 한림항 밤바다에 나갔다 혼돈과 평온 사이를 오가는 마음처럼 밀물과 썰물이 들락날락하는 어두운 밤바다 고깃배가 대낮처럼 불 밝힌 수평선을 바라보며 등대가 있는 방죽 끝까지 혼자서 씩씩하게 두 팔을 휘저으며 걸었다 방파제엔 가끔 등짝까지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어둠 속에 유령처럼 앉아 있다. 내 안에 여태 크지 못한 어린아이,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으로부터 이제는 빠져 나올 길도 없는 아이와 함께 어두운 밤바다를 걷다보면 어쩌면 조롱 같은 파도 소리, '허우적허우적 철썩, 허우적 철썩,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도 살아내는구나'

나의 시 2020.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