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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 ㅡ 나희덕 '뿌리로부터'

sunnyyoung 2014. 9. 25. 13:06

 

 

 

 

<결실과 조락이 시작된 마당 풍경>

 

ㅡ뿌리로부터 ㅡ

나희덕

 

한 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뽀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 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 버린 지 오래된 사람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어제까지 비 오고 바람 불었는데 오랜만에 화창한 가을 햇살이 마당에 가득하다.

 

한 달에 거의 반 정도 흐리고 비 오는 요즘의 제주의 나날들을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제주에 와 있는 타지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이집 저집에서, 아니면

특정 장소에서 수시로 모인다. 모임 부적응자인 내게는 해당 안 되는거지만.

 

그런데 옆집에서 최근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폭우가 오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듣기는 어렵다.

아무 일이라도 찾아서 해야한다

 

생활이 한없이 단순해진다.

바라던 상황이었을텐데, 문득 염려가 들기도한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건지......

 

나희덕 시인의 최근 시집을 사 놓고 대충만 훑었던 것을

가을 햇살이 환한 창가에 앉아 다시 읽으니

오랜만에 시집을 읽는 마음이 달다.